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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대상 수상작 「봄날의 바람」
나는 시골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따스해진 날에 새싹들이 고개를 내밀던 때에 나의 부모는 땀을 흘리며 그들의 밭을 일구었다. 딸 셋을 그리 키워냈다. 봄에 꽃구경을 시켜주고 싶어서, 여름에 시원한 수박을 먹었으면 해서, 가을에 새 옷을 선물하고 싶어서, 겨울에 추위에 떨지 않았으면 해서. 봄은 그 모든 바람의 시작이었다. 새벽부터 온몸이 땀에 젖도록 밭을 일궜다. 씨앗을 잘 심지 못하면 싹이 나지 않는다. 싹이 나더라도 밤낮으로 물을 주지 않으면 잎이 자라지 않는다. 잎이 나더라도 들여다보지 않으면 벌레가 들끓는다. 밭에서 자라던 그들의 새싹은 세 딸과 같았다. 밭도, 아이도, 그들의 돌봄 속에 무럭무럭 자라났다. 막내인 나는 봄에는 꽃구경하고, 여름엔 시원한 수박을 먹고, 가을엔 새 옷을 입고서, 겨울엔 따뜻한 이불 속에 있었다. 잘 가꿔진 밭에서 쑥쑥 컸다.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언니들이 독립한 후에는 부모님과 셋이 지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봄은 년 중 가장 바쁜 계절이었고 그들의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 부족한 시간 속에서, 그들이 흘린 땀 속에서 나는 자랐다. 열다섯, 질풍노도의 시기라는 그 나이에 나는 매서운 바람이었다. 오매불망 언제 오나 부모님의 트럭을 찾던 내 눈빛이 변했다. 하교 시간에 맞추어 오던 그들의 흙 묻은 장화와 낡은 트럭이 부끄러워졌다. 함께 집으로 가던 때면 엄마는 종알종알 오늘은 어땠어? 친구들이랑은 잘 놀았어?' 하며 묻곤 했다. 늘 듣던 엄마의 물음이 그날따라 귀찮았고, 그날따라 엄마의 파란 장화에 묻은 흙이 많았다. 길가에 줄지어 흔들리던 분홍색 벚꽃잎이 샘나게 예뻤다. 그래서 심술을 부렸다. “엄마, 다른 애들 엄마 아빠는 다 승용차 타고 다니잖아. 멀끔한 옷 입고 다니잖아… 나 데리러 올 때만큼은 좀 씻고 오면 안 돼? 엄마는 왜 만날 더러운 장화야? 우리도 승용차 타면 안 돼?” 마음을 떠다니던 말이 목구멍으로 쏟아져 나와버린 때에 엄마의 표정을 기억한다. 주워 담을 수 없게 쏟아져 버린 말들이 엄마의 작은 가슴 밭에 기어이 구덩이를 파냈다. 내가 나를 키운 밭을 갈아엎었다. 커다란 쇠쟁기를 꽂아 사정없이 푹푹 헤집었다. “응, 알았어. 그러자. 그렇게 하자.” 목이 메 간신히 말하는 엄마의 목소리를 들었다. 만개한 벚꽃 사이를 달리는 그 트럭 속 땀에 젖은 엄마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얼굴에, 그 목소리에, 봄바람에 날아가던 정신이 들었다.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달리는 트럭 안에서 박박 눈을 문질렀다. 아마 엄마는 나 때문에 울지 못했으리라. 서럽게 우는 아이의 앞에서 부모는 그저 헤집어진 가슴을 부여잡았을 테니. “나 이제 버스 타고 다닐게.” 나는 이제 버스를 타겠노라, 선언했다. 새벽에 첫차를 타지 않으면 다음 버스는 시간 뒤에 오는 시골에서 부모는 아침잠이 많은 딸을 위해 트럭을 몰았다. 그리고 나는, 그런 부모의 사랑을 제쳐두고 내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그렇게 이야기했다. 그 뒤로 부모님은 학교에 오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집에 ‘다녀왔습니다’ 할 때면 종알종알 내 하루를 묻던 엄마가 그리웠다. 낡은 트럭에서 나누던 이야기들이 참으로 귀한 것이었다. 나누는 말의 마디가 짧아지기 시작한 때에 나는 그렇게 철이 들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부모님은 까만 승용차 한 대를 샀다. 그 차를 나에게 소개하던 엄마의 신이 난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하다. 이제 괜찮아? 우리 딸 보러 가도 괜찮아?'하고 묻는 듯한 탓에 목이 메었다. 매끈하게 빛나던 그 차에 올려진 부모님의 거칠고 투박한 손은 모두 나 때문이었다. 아직 꽃이 피지 않은 서늘한 봄에 열린 내 입학식에 엄마와 아빠는 그 차를 타고 왔다. 옷장 깊은 곳에 넣어뒀던 가장 멀끔한 옷을 입고 샛노란 프리지어 꽃다발을 안고 왔다. “딸, 입학 축하해. 엄마 괜찮아? 머리가 좀 이상한가?” 분홍 머리핀을 꼽고 꽃처럼 웃음 지으며 연신 묻던 우리 엄마가 게서 가장 예뻤다. “입학 축하한다.” 넥타이를 맨 아빠가 나를 품에 안고 굳은살이 다 박인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를 키운 그 밭의 흔적이었다. 내가 쇠쟁기로 헤집어 놓은 그 밭이 결국 다시 나를 보듬었다. 영원히 나를 키울 밭이었다. 엄마와 아빠는 하교 시간에 년 내내 먼저 와 나를 기다렸다. 자율학습이 끝나는 밤 0시에 단 한 번도 나는 부모님을 기다린 적이 없다. 우리의 까만 승용차에선 항상 비누 냄새가 났고, 흙 묻은 장화는 더 이상 거기에 없었다. 나는 나중에야 그 낡은 트럭이 내가 태어나던 해에 산 것임을 알았다. 새하얀 트럭을 사던 때에 부모님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들의 아이가 자라나는 모든 순간을 함께할 트럭을 사던 때에 얼마나 설레었을까. 내 기억 속 트럭은 어석더석 잘라 붙인 콜라주 사진이었지만 그들에게 그 트럭은 길고 애틋한 한 장의 파노라마였다. 녹음이 세상을 덮고 그 사이로 향기 좋은 바람이 불어오면 어느 농부의 딸은 마음 한구석이 시려온다. 벚꽃이 만개해 바람에 날리면 엄마의 흙 묻은 파란 장화와 낡은 트럭을 생각한다. 제멋대로 헤집어 놓은 밭에 봄물이 들어 그 흔적이 아스라이 잊히기를, 명지바람 불어 기분 좋은 봄 내음만 남기를. 그것이 영원한 내 봄날의 바람이다.
2025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우수상 수상작 「길었던 내 계절을 지나」
아침에 눈을 뜨면 나는 가장 먼저 귀를 기울인다. 거실에서 돌아다니는 엄마의 인기척은? 창문 밖의 달궈진 자동차 소리는? 제대로 가늠이 가지 않을 때, 나는 직접 입 밖으로 목소리를 토해내 본다. “아아. 아아아.” 세심한 시험을 통해 귀가 먹먹하거나, 검열 소음 같은 삐- 소리가 사이렌처럼 머리를 울려댄다 싶을 때는 침대 옆 책상의 약통에서 알약을 꺼내 먹는다. 내 책상 책꽂이 한편에는 약국에서 처방받은 약봉지가 빼곡했다. 아직 먹지 못한 약도 많고 유통기한이 지난 약도 많지만, 없는 것보단 차라리 필요 없더라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편이 정신 건강에 좋았다. 나는 돌발성 난청을 앓고 있었다. 고2 가을에 발병된 돌발성 난청은 고3을 지나 20살의 새해를 함께하고 있었다. 온 세상이 나를 놔두고 홀로 앞서가 멀리서 속삭이는 기분 나쁜 감각. 육체는 현실에 있지만, 청각만은 저 아래 파묻혀 마치 현실의 소음을 지직이는 라디오로 넘보는 듯한 괴리감. 그 불쾌함과 어지럼증은 이제 내게 외면과 반항을 일으키기보다 ‘오늘은 조금 심하네’ 따위의 가벼운 감상으로 나를 순응시키고 있었다. 내가 앓는 돌발성 난청은 영구적인 청력의 손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언제든지 영구적인 손상으로 남을 수 있다고 고2 때 의사는 말했다. 그 한 마디는 당시의 내 안에 경각심으로 포장한 불안함의 씨앗을 낳았다. 고3에 올라간 나는 공부에 집중하지 못했다. 아침에 증상이 있으면 쫓기듯 개원 시간보다 일찍 병원에 들렀다. 수업 시간에도 툭하면 불안함에 귀를 기울여 양쪽 귀의 청력 차이를 느끼려 했고, 조금이라도 이상하다고 느낄 땐 망설임 없이 조퇴하고 병원으로 향했다. “어 그래. 왔니?” 그러면서 어느 순간부터는 담임 선생님의 시선조차 무심하게 변해버리고 말았다. 병원에 들려 챙겨온 진단서는 접혀져 고3 학생 관리로 바쁜 담임 선생님의 책상 구석으로 향했다. 어쩔 수 없다는 건 알지만 그걸 바라보며 선생님이 내가 어디가 아픈 건지, 병명이 뭔지 정확히 기억은 하실까 의문하게 되고 말았다. 다른 사람들에게 내 상황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오히려 멀쩡해 보이는데 저 정도까지인 걸까, 하는 눈빛을 보내곤 했다. 가끔 동정표를 던지는 이들도 있었지만 앞선 이들의 반응으로 내가 그들을 속이는 양치기 소년이 되어버린 기분이었다. 그 시점에서 나는 그저, 한낱 난청 호소인으로 전락한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내 입으로 돌발성 난청에 대해 말을 꺼내는 일은 줄어들었다. 상대방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더라도, 병명을 꺼내기보단 잘 못 들었으니 한 번만 다시 말해달라며 머쓱하게 웃어넘기곤 했다. 그렇게 그냥 속에 묵힌 채, 조용하게 지내기 시작했다. 그런 하루하루가 반복되다 보니 언제부턴가 내 방은 죽어버리고 말았다. 창문은 외부의 잡다한 소음들을 가렸고, 한때 온갖 선율을 연주하던 사운드바는 먼지로 덮여 있었으며, 스마트폰은 최소 음량으로만 소리를 유지해두고 있었다. 스스로도 메마르고 있다고 실감할 정도로 지독한 침묵의 늪이었지만, 조금이라도 증세가 악화되지 않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아니, 사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을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나는 방 속에서 천천히 가라앉고 있었다. 듣는 것이 불안했으니까. 그러나, 이따금씩은 약으로도 해결되지 않는 날이 있었다. 그럴 경우엔 여느 때처럼 큰 소음을 대비한 귀마개를 챙겨 병원으로 향한다. 4월 초였다. 20살이지만 나는 대학에 가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런 몸 상태로 학교를 다니기엔 여러 애로 사항이 있었으니까. 고등학생 때처럼 학교에 가야 한다는 의무감이 사라진 하루는 무료함과 동시에 근원 모를 조바심을 일으켰지만, 한편으론 어느 때보다 후련했다. 매일매일 폐를 옥죄이던 특유의 압박이 사라져 있었다. 마침내 자유가 된 노예의 기분이랄까. 조금은 가벼워진 사람들의 옷차림과 추위에 움츠러들지 않고 꼿꼿하게 세운 허리가 이전엔 없었던 개운함을 일깨웠다. 청력 검사를 받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의사의 조언이 끝난 뒤에 가벼운 치료를 마치면, 처방전을 받는다. 하지만 그날은 약국에 들르지 않았다. 약이 남는 한이 있더라도 언제나 처방을 빼먹지 않던 내게 그건 그저 어쩌다 한 번 있을 단순한 변덕이었을까. 간만의 외출을 만끽하며 돌아온 아파트 단지. 파릇한 나뭇잎 무리의 반짝이는 그림자 위를 걸었다. 문득 바람을 타고 날아드는 달큰한 꽃향기가 코를 간질였다. 고개를 들었다. 풍성하기보단 쥐어 짜낸 듯 피어오른 봄날의 꽃. 부는 바람에 떨어지고 있는 꽃잎들이 내가 이 봄의 일부에 섞여 있다는 듯 나의 세상을 한가득 품어 안았다. 집에 돌아왔다. 오랫동안 열지 않았던 방의 창문을 열었다. 몸을 웅크리게 만들었던 백색 겨울은 지나갔다. 산뜻한 기류가 몰아쳤다. 싱그러운 햇살이 방을 일깨우고, 상쾌한 공기가 폐부를 벅차게 만들었다. 짹짹, 희미하게 지저귀는 새소리가 나와 방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물러날 곳 없는 지금이야말로 시작이라는 양, 봄바람은 단조로웠다. 아무리 귀가 먹먹해도, 삐- 이명 소리가 나를 방해할지라도, 내게 봄은 듣는 것이 아니었다. 침묵이란 계절의 끝맺음이자, 새 출발의 신호탄. 불안이란 밧줄을 풀어헤치는 자유. 창문을 여는 것만으로 나는 봄에 묻어있었다.
2025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최우수상 수상작 「봄의 발자국」
“불에도 발자국이 있다는 거 아니?” 조선소의 하청업체에서 용접 일을 하던 아빠는 그렇게 말했다. 이불 꽃들이 발자국을 남기며 쇠와 쇠 사이를 이어주는 거야. 불은 정말로 차가운 금속 위에서 한 걸음씩 내디뎠다. 그렇게 걷고 걸어서 각자였던 것을 하나로 만들었다. 나는 용접 면 너머 아빠의 모습을 가만히 바라봤다. 두 눈이 사방으로 튀는 불꽃처럼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어릴 적, 아빠의 손을 잡고 조선소에 간 적이 있었다. 파란 하늘과 그보다 더 파란 바다 사이에 솟은 주황색 크레인 밑으로 회색 작업복을 입은 어른들이 지나다녔다. 이 사람들이 다 같이 배를 만드는 거야. 아빠는 바다 위에 떠 있는 하얀 선박을 가리키며 말했다. 그 배는 멀리서 바라봐도 두려움이 느껴질 정도의 크기였지만, 아빠의 얼굴은 어느 때보다도 행복해 보였다. 부자재들을 올려두던 선반이 무너지며 아빠의 발 위를 덮친 것은 얼마 전 일이다. 사고 이후로 아빠는 절단된 다리로 매일 집을 나섰다. 재활센터에 가는 날보다도 발길이 닿는 대로 해가 질 때까지 걸어 다니는 날이 더 많았다. 그것을 생각하면 나는 좀처럼 다른 일에 집중할 수 없었다. 이렇게라도 운동해야지. 아빠는 그렇게 말하며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손을 휘휘 저었다. 나는 가끔 아빠의 뒤를 몰래 따라나섰다. 같이 가자고 한다면 그럴 필요 없다며 또 고집을 부릴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아빠는 걸음은 매일 똑같았다. 같은 길을 걸었고, 같은 발자국을 남겼다. 버스를 타고, 공원을 한바퀴 돌고 난 뒤, 주택가 골목으로 들어선 다음, 그 골목 사이에 난 좁은 샛길로 들어갔다. 그 샛길은 막다른 곳이어서 나는 항상 골목까지만 아빠를 지켜봐야 했다. 덜그럭거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늦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의아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방에서 나는 소리인 듯 했다. 방문을 열자 홀로 의족을 고치고 있는 아빠가 보였다. 의족은 나사가 몇 군데 빠져 있었고, 심지어 발을 지탱하는 부분은 찌그러져 있었다. “아빠, 이거 왜 그래?” 아빠는 내 말을 못 들은 체하며 나사를 조였다 풀기를 반복했다. 나는 아빠가 대답해 줄 때까지 기다릴 심산으로 계속 되물었다. 마침내 아빠는 한숨을 쉬며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아빠는 주로 반바지를 입었는데, 그래야지만 버스 기사가 자신이 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다려 주었기 때문이다. 무심코 긴바지를 입고 나간 오늘은 버스에서 넘어지고 말았다. 이야기를 들은 후 나는 새벽 내내 잠을 이루지 못했다. 눈을 감으면 자꾸만 버스에서 힘을 줄 새도 없이 고꾸라졌을 아빠가 떠올랐다. 냉장고에서 찬물을 꺼내서 마셨지만, 목과 가슴 사이 어딘가가 꽉 막힌듯한 감각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다음 날, 나는 의족을 수리하러 가는 아빠의 뒤를 몰래 밟았다. 한 다리로 목발을 짚기에는 버거웠기 때문에 아빠는 휠체어를 타야 했다. 나는 아빠의 발자국 대신 바퀴 자국을 따라갔다. 아빠는 평소처럼 공원을 한 바퀴 돌고, 골목에 들어가서, 샛길로 빠졌다. 나는 멀찍이서 그것을 지켜보았다. 평소였다면 여기서 몸을 돌려 나갔겠지만,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샛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길은 두 사람이 나란히 걷기엔 비좁을 정도의 크기였다. 붉은색 벽돌로 쌓은 벽이 쭉 이어졌다. 샛길은 길지 않았고, 나는 금세 아빠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휠체어 바퀴는 막다른 벽 앞에 멈춰 있었다. 그 벽은 다름 아닌, 활짝 만개한 벚꽃 나무 한 그루였다. 아빠는 그것을 오랫동안 바라봤다. 내가 벚꽃을 보자마자 느꼈던 것을 아빠도 느꼈으리라고 생각했다. 아주 오랜 시간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켰을 거란 걸 단번에 알만큼 크고 견고한 나무였다. 그 아래에서 한없이 작아진 아빠는 그저 흩날리는 벚꽃잎을 바라보며 자리를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아빠, 배는 어떻게 물 위에 떠?” 언젠가 아빠에게 그렇게 물었던 적이 있다. 어린 나는 커다란 쇳덩어리가 어떻게 가라앉지 않고 바다 위에 뜰 수 있는지 궁금했다. 아빠는 내게 부력에 관해 얘기 해주었다. 중력에 반하는 부력이라는 힘이 배가 떠오를 수 있도록 해준다고. 그러니 중력이 클수록 부력 또한 커지는 것이라고. 나는 그것이 사람과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억눌릴수록 자유로워지고 싶고, 고통스러울수록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이제는 아빠에게 말해주고 싶다. 끝날 것 같지 않던 겨울도 묵묵히 추위를 견뎌내다 보면 반드시 새 계절이 돌아온다고. 꽝꽝 얼었던 마음이 녹아내리고, 새싹이 움트면 언제고 인생의 봄날도 다시 시작되는 것이라고. 그때, 불꽃이 심겨있던 아빠의 두 눈동자를 아느냐고. 사방으로 흩날리는 새하얀 벚꽃 잎보다 더 아깝고, 아름답고, 값진 눈을.
2025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우수상 수상작 「너의 등을 밀어주는 일」
너도 고래가 되고 싶었구나. 작년 가을이었다. 단풍은 이미 절정을 지난 지 오래였고, 캠퍼스는 입시 기간 특유의 적막에 잠겨 있었다. 정과 나는 학교 뒤편 작은 언덕에 앉아 텅 빈 교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캠퍼스. 그 사이사이로 붉고 노란 잎들이 풀꽃처럼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낙엽이 바람에 쓸릴 때마다 언덕 위를 덮고 있던 노란 그림자들이 나직하게 흔들렸다. 가을이 우리를 무심하게, 그러나 그 무엇보다 따뜻하게 감싸 안고 있었다. 그 언덕의 끝자락에서, 정이 말했다. “나, 이 언덕에서 밀어 떨어뜨려 줘.” 정과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연극동아리에서 처음 만났다. 정은 출석보다 결석이 많았고,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게 된 건 동아리에서부터였다. 태어날 때부터 신장이 약해 투석 치료를 받아야 했던 정은 말수도 적었지만,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만큼은 누구보다 섬세하고 독특한 아이였다. 우리는 함께 희곡을 썼고, 연말 학교 축제 무대에 배우로서 함께 올랐다. 제목은 ‘멸치들의 꿈’. 나는 고래가 되고 싶어 하는 멸치, 정은 그런 나를 묵묵히 믿어주는 친구 멸치 역할을 맡았다. 짧은 연극이었지만 우리는 그 안에 서로를 담았다. 고래가 되고 싶었던 나, 그리고 나를 조용히 응원하던 정. 그건 단순한 역할극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 그 자체였다. 졸업을 앞두고 나는 글을 전공으로 배울 수 있는 대학에 합격했고, 건강이 더 악화된 정은 졸업식도 치르지 못한 채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그렇게 세상은 우리를 각자의 속도로 끌고 갔다. 연락이 뜸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정에게 연락이 온 건 내가 군 복무 중일 때의 일이었다. 국방부 의장대대에서 행사병으로 복무하던 나는 전역을 몇 주 앞두고 정으로부터 문자 한 통을 받았다. “나 너희 학교 시험 보러 가.” 3년 만이었다. 정이 여전히 희곡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동시에 그 시간 동안 얼마나 버텨냈을지를 생각하니 마음 한편이 저릿했다. 나는 짧게 답했다. 전역 전 마지막 휴가가 시험 기간과 겹친다며, 볼 수 있을 거라고. 시험이 끝난 뒤, 우리는 학교 근처 한정식집에서 밥을 먹었다. 정은 예전보다 말이 적어졌지만, 그 침묵은 오히려 편안했다. 나는 반찬으로 나온 멸치볶음을 먹기 위해 젓가락을 들었다. 그 순간, 정이 내게 물었다. “언제부터 오른손잡이가 됐어?” 그 말에 나는 그제야 내 손을 내려다봤다. 오른손이었다. 원래 왼손잡이였던 나는, 군대라는 사회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연스레 오른손을 익혀야 했다. 의장대에선 모두가 오른손으로 총을 들고, 오른손으로 제식을 해야 했으니까. 그때까지는 그렇게 사는 게 더 편하다고 여겼다. 아니, 어쩌면 단지 덜 불편하고 마찰이 없는 쪽을 선택했을 뿐이었다. 정이 말했다. “후천적 오른손잡이네.” 정은 그 말 외에는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한마디에 나는 오래 멈춰 있었다. 감정도, 판단도 담기지 않은, ‘정’만의 고유한 말. 식사를 마친 우리는 캠퍼스를 걷기로 했다. 정이 학교를 좀 더 둘러보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학생들의 추억이 깃든 낡은 계단들을 오르고, 다리 밑을 지나고, 벤치에 자주 멈춰 앉았다. 정은 오래 걷지 못했다. 대신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정이 견뎌낸 시간만큼이나 느린 걸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캠퍼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잔디 언덕이었다. 언덕 끝자락에 선 정이 등을 돌리고 앉았다. 기울어가는 햇빛이 정의 어깨를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제야 정이 입을 열었다. “나, 이 언덕에서 밀어 떨어뜨려 줘.” 처음엔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이토록 연약한 너를 알고 있는 내가, 너에게 어떻게 그런 가혹한 짓을 저지를 수 있을까. 그런데 정은 웃지 않았다. 그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너도 나만큼이나 진심이었구나. 정은 말했다. 이 언덕에서 굴러떨어지면 꼭 합격한다는 미신이 있다고. 그리고 덧붙였다. “그런데, 나 혼자서는 못할 것 같아.” 정이 앞서 말한 ‘후천적 오른손잡이’라는 말이, 그제야 온전히 이해되었다. 그건 단순한 관찰이 아니었다. 내가 잊고 있던 나의 조각을 붙잡고 있는, 아주 조용하고 깊은 기억이었다. 세상이 내게 변화를 강요할 때, 내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잊지 않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 정은 나만이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을 조심스레 꺼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정의 등을 조심스럽게 밀었다. 정은 언덕 아래로 굴러가며 크고 명랑하게 웃었다. 나도 웃었다. 오래된 안간힘과 침묵이 한꺼번에 언덕 아래로 구르며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이제 안다. 다정이란, 아주 사소한 것조차 기억해 주는 일이다. 그것은 누군가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그 사람이 더 멀리, 더 깊은 바다로 나아가길 바라며 말없이 등을 밀어주는 마음. 정은 그런 사람이었다. 고래를 꿈꾸는 멸치를 진심으로 믿어준 사람. 세상이 나를 오른손에 맞추게 했을 때, 나조차 잊고 있던 나의 왼손을 끝까지 기억해 준 사람. 이제는 정이 나 대신 고래가 되길 꿈꿀 차례였다. 그 다정한 마음이 결국, 우리 둘을 이곳까지 데려다주었다. 우리만의 작은 소란이 있고 난 뒤, 정은 그 다음 해 봄, 이 학교에 입학했다. 21학번인 나와 25학번인 정은 이제 선후배가 되어, 다시 하나의 이야기를, 우리만의 방식으로 써 내려가고 있다.
2025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장려상 수상작 「새로운 녹음_통화기록20250203.m4a」
…허이고, 순진한 소리 하고 있네. 너 봄이 얼마나 잔인한지 몰라? 이거 내가 알려줘야겠구먼. 야, 사람들이 봄에 보고 좋아하는 거 뭐야. 꽃! 언제 언제 핀다고 날씨에서까지 알려주잖아, 구경 나가라고. 근데 너 세상 모든 꽃들이 다 똑같이 이쁘게 피는 것 같어? 봄이 온다고 날 따뜻하다가 갑자기 눈 내리고, 죽어라고 바람 불고, 그거 다 이유가 있다니까. 이게 꽃인지, 그냥 풀떼긴지 가려낼라고 그러는 거야 하늘이. 아니, 꽃샘추위가 아니라. 그거는 겨울이 뭐 꽃 핀다고 샘내서 그런 거잖어. 내 말은 봄이 제 자리 떡하고 들어차기 전에 이게 이쁜 꽃일지, 금방 죽을 풀 쪼가리인지 심판한다는 거지. 추운 겨울 잘 견디고 가지에서 뻗어 나왔다고 꽃이 다 피는 게 아니라니까. 꽃 피우기 직전까지도 시험에 들게 하는 놈이 봄이야. 얼마나 잔인하냐? 내가 봄을 이상하게 보는 게 아니고. 아니, 봐봐. 피지도 못하고 죽는 꽃들도 당연히 있을 거 아냐. 근데 걔네가 다른 꽃들이랑 뭐가 그렇게 달라서 시작도 전에 지겠냐? 걔네도 꽃 한번 피워보겠다고 엄청나게 노력했을 걸. 세차게 비를 뿌려서 거의 다 키운 봉오리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바람을 무섭게 불어대서 줄기를 다 꺾어버리잖아. 이쁘고 강한 애들만 피워주려고 봄이 시험하는 거라고, 그게. 그냥 봄이 잔인한 거야. 근데, 갑자기 생각난 건데 인간도 똑같지 않아? 그 왜, 봄에 자살률 급증한대잖아. 그거 뉴스에도 나오던데. 뭐라더라? 스프링 피크, 뭐 그렇대. 만물 소생의 계절이니 뭐니 하면서 봄이 뭐 엄청 대단한 것처럼 얘기하는데 그거 절대 맞는 말 아니다. 아픈 사람들 더 아프게 만들어서 죽고 싶게 만드는 건데 그게 뭐 그렇게 멋진 계절이라고. 꽃인지 풀인지 골라내는 것처럼 인간도 아픈지, 멀쩡한지 골라내는 거잖아. 어우, 난 이제 봄 오는 게 무섭다. 이놈의 비염. 이번에도 약이나 먹고 맨날 졸아 대겠지, 뭐. …여보세요? 나 엘리베이터 집 들어왔어. 다시 말해, 이제 들려. 응, 그치. 모든 꽃이 봄에 피진 않지. 어… 동백! 동백이 겨울에 피지. 우리 전번에 언니들이랑 부산 여행 갔었을 때. 어, 그때 우리 동백꽃 빨간 잎 위로 눈 쌓인 거 보고 신기하다고 사진 무지하게 찍었잖아. 그때가 1월이었나, 그랬지 겨울에 피는 꽃 이거 말고도 더 있지 않나? 예전에 무슨, 겨울에 피는 꽃의 생명력인지 뭔지로 만들었다는 화장품 광고도 있고 그랬잖아. 너도 기억나지? 다행이다, 나만 늙은이일 뻔 맞네, 그러고 보니까 꽃이 다 봄꽃은 아니네. 여름에 무궁화 피고, 가을에 코스모스 있고. 이렇게 보면 봄에 너무 의미 부여할 거 없다니까. 하여튼 자연이 신기해. 꽃들도 자기 때를 어떻게 그렇게 기가 막히게 알아서 딱딱 맞춰가지고 피고. 당장 봄 왔다고 아무렇게나 피지 않고 천천히 기다렸다가 자기 차례 때 피어나잖아. 내 말이. 봄이 뭐 별거냐? 자기 꽃 피우는 그때가 지 봄인 거지. 동백꽃한테는 눈 펑펑 내리는 겨울이 자기 봄날인 거야. 몰라, 사계절 중에 봄의 위상을 좀 낮출 필요가 있어. 어느 계절에 펴도 봄날은 봄날이지. 봄이 봄날을 뺏어가게 두면 안 돼. 봄이랑 봄날은 다르다, 이거지. 봄은 딱 삼 개월, 봄날은 꽃 피우는 날 언제든. 내가 피어야겠다, 하면 그게 언제든 다 봄날이다, 뭐 이런 말이야. 아휴. 나이가 들었나? 이런 실없는 소리나 하고 있다. 혹시 또 모르지, 어떤 꽃은 나한테 알아줘서 고맙다고 할지 누가 알아. 다른 계절에 피는 친구들은 봄만 오면 마음이 조급할걸? 그럼 나는 걔네한테 마음대로 천천히 자라라고 해줘야지. 어머? 얘 좀 봐라. 우리 집 다육이들은 다 듣고 있다니까. 얘네도 사람이랑 똑같아, 얘네도 귀 있어. 다 알아들어. 진짜라니까 그러네 됐고, 와서 봄동이나 좀 가져가. 맛있다고 엄청 해놨는데 누구 집 딸내미는 매워 보인다고 안 먹겠대. 떡볶이는 잘만 먹는 게 봄동은 매울 것 같단다. 요즘 학교 끝나고 떡볶이 사 먹는 게 낙이야, 아주. 응. 그래, 오기 전에 전화만 해. 그래. 응. 어, 들어가, 어. 어.
2025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장려상 수상작 「그건 고작 찹쌀떡인데」
“다이후쿠 먹어봤어?” 교토 근교 시가현에 사는 친구 소가 만나자마자 그렇게 물었다. 소의 집은 ‘비와’라는 큰 호수 옆에 있다. 서울보다도 큰 비와호수. 한 달 동안 교토에서 지내기로 했다고 말하자마자 소는 내게 자기 집에 꼭 와보아야 한다고 말했다. 교토에 한 달 동안 살겠다고 생각한 건 내가 일본어를 한마디도 못 하기 때문이었다. 듣지도, 말하지도 못하는 곳에서 일상을 보내보자. 다른 아픔이 있었던 건 아니고 늦은 사춘기였을 지도 모르겠다. 삼 주가 지나도록 나는 입을 거의 열지 않았다. 내뱉는 말이라곤 “이거 하나요”와 “아리가또고자이마스”가 전부였다. 가끔 부모님과 전화해도 그리 많은 말을 하진 않았다. 엄마의 질문에 대답하다 보면 삼십 분이 훌쩍 지났으니까. 엄마는 항상 그런 걸 물었다. “춥지 않으냐, 저녁은 뭘 먹었느냐.” 한국에서도 물어보던 것들. “엄마, 여기 12도까지 올라가, 거긴 영하 12도지?”라는 말을 한 세 번 정도 하고 나면 엄마는 정말 따뜻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여기 음식에는 자극적인 맛이 없어서 가끔 김치가 생각나.”라고는 말하지 못했고. 소의 집은 정말 호수 바로 옆이었다. 소가 자랑하던 그의 골든 리트리버 슈짱은 침을 질질 흘리는데도 귀여웠다. 몸집은 또 커서 한번 안겨들면 두 발 정도는 뒤로 밀려났다. 소와 슈짱 그렇게 셋이서 한참 동안 호수를 뛰어다니다 왔다. 나는 지쳤고, 소는 숨을 조금 헐떡였고, 슈짱은 행복해 보였다. 소의 가족들과 차를 마셨다. ‘다이후쿠’라고 불리는 찹쌀떡들을 소의 어머니가 준비해 주셨다. 그래서 나에게 다이후쿠를 물어보았구나. 배려도 참 세심하게 하는 가족이구나. 우리의 대화는 주로 한국에 관한 질문과 나의 대답으로 이어졌다. 녹차와 다이후쿠를 함께 먹었는데, 소는 나의 말을 통역하느라 그 맛있는 다이후쿠를 한 입도 먹지 못했다. 소의 어머니는 내게 참 많은 걸 물어보았다. 군대는 어떠냐, 한국의 수험생활은 어떠냐. 참 어머니다운 질문들이었다. 일본에서는 뭘 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있는 그대로 조용히 밥 먹고, 커피 마시고, 일기를 쓰는 나의 일상을 이야기했다. 소의 어머니는 잠시 생각하더니 내게 엄마가 보고 싶지는 않냐고 말했다. 그러자 엄마가 보고 싶었다. 비가 그친 어느 날은 교토의 큰 공원에 갔다. 이 도시는 비가 아무도 모르게 온다. 날아다니는 씨앗이나 이불에서 털어져 나온 먼지처럼 햇빛을 받으며 연약하게 날아다닌다. 두 번이나 그랬다. 두 번이나. 두 번이면 우연은 아니지. 두 번까지는 우연일 수 있으려나. 거긴 네 명이 끌어안아도 모자랄 만큼 두꺼운 고목들이 있었고 그에 비하면 갓 태어난 노인 둘이 손끝을 붙여가며 나무를 끌어안고 있었다. 이런 사랑스러운 도시를 봤나. 이 도시는 비와 해가 서로를 침범하지도 않는다. 그새 구름도 없는 하늘이 되어 고개를 들면 바다에 빠진 것 같았고 따뜻한 수증기가 땅 근처에서 어른거렸다. 그런 공원에 꽃까지 피기 시작했다. 갓 벌어진 봉오리와 하얗게 박힌 점들, 봄은 이토록 화려하게 등장한다. “엽서를 써봐, 써서 이리로 보내줘.” 마침 아름다운 공원을 본 날, 엄마로부터 이런 말을 들어서 옳다구나 하고 엽서를 사두었다. 비와 꽃과 봄이 모였던 공원 이야기를 쓰려고 했는데 자꾸 소의 어머니 생각이 났다. 집에 돌아가는 내게 다이후쿠와 일본의 과자를 잡히는 대로 챙겨주던 소의 어머니, 편의점에서 살 수 있는 페트병 녹차마저도 하나 집어주던 소의 어머니, 제 아들을 안은 채 전철 개찰구를 지나는 나에게 손을 흔들던 어머니. 엄마, 쓸 말이 바로 떠오르지는 않았다. 크지 않은 엽서라서 신중해지고 싶었다. 교토에 사는 친구 소의 집에 다녀왔어. 세상의 엄마들은 어쩜 그리 똑같은지, 내게 군대와 수험생활을 물어보시더라고. 소와 소의 형을 번갈아 보면서 말이야. 다이후쿠라는 찹쌀떡도 주셨어. 내가 찹쌀떡을 좋아한다고 말했더니 돌아오는 길에 다이후쿠를 한가득 챙겨주셨어. 그리고 나를 배웅해 주셨는데, 내가 개찰구를 지나는 모습을 바라보시던 거 있지. 어쩜 엄마들의 눈빛은 어디서 수업이라도 듣는 거야? 서울로 가는 나를 데려다줄 때마다 엄마한테서 보이던 그대로였어. 아들 친구도 아들처럼 보일까? 만약 소가 한국에 온다면, 내가 우리 집 강아지를 보여주고 싶다고 집에 데려가면, 삼겹살을 구워주고 하루 잘 놀다가 소와 같이 집을 떠날 때 엄마도 소를 그렇게 바라보겠지? 엄마, 이곳은 매화가 벌써 폈어. 엄마가 걱정 안 해도 될 정도로 따뜻하거든. 엄마, 이곳은 봄날이 왔어. 그곳도 봄이 곧 오겠지? 비가 오길래 비가 오나보다 했지. 그런데 비가 그치고 나가보니 맑고 따뜻하고 꽃이 피어있더라고. 봄비였어. 내가 지금까지 봄비인 줄도 모르고 봄비를 맞고 있었나 봐. 나도 사랑해. 작은 다이후쿠를 그려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