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대학생 에세이 공모전 우수상 수상작 「너의 등을 밀어주는 일」
너도 고래가 되고 싶었구나.
작년 가을이었다. 단풍은 이미 절정을 지난 지 오래였고, 캠퍼스는 입시 기간 특유의 적막에 잠겨 있었다. 정과 나는 학교 뒤편 작은 언덕에 앉아 텅 빈 교정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람 하나 보이지 않는 캠퍼스. 그 사이사이로 붉고 노란 잎들이 풀꽃처럼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낙엽이 바람에 쓸릴 때마다 언덕 위를 덮고 있던 노란 그림자들이 나직하게 흔들렸다. 가을이 우리를 무심하게, 그러나 그 무엇보다 따뜻하게 감싸 안고 있었다.
그 언덕의 끝자락에서, 정이 말했다.
“나, 이 언덕에서 밀어 떨어뜨려 줘.”
정과 나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연극동아리에서 처음 만났다. 정은 출석보다 결석이 많았고,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게 된 건 동아리에서부터였다. 태어날 때부터 신장이 약해 투석 치료를 받아야 했던 정은 말수도 적었지만, 마음을 표현하는 방식만큼은 누구보다 섬세하고 독특한 아이였다.
우리는 함께 희곡을 썼고, 연말 학교 축제 무대에 배우로서 함께 올랐다. 제목은 ‘멸치들의 꿈’. 나는 고래가 되고 싶어 하는 멸치, 정은 그런 나를 묵묵히 믿어주는 친구 멸치 역할을 맡았다.
짧은 연극이었지만 우리는 그 안에 서로를 담았다. 고래가 되고 싶었던 나, 그리고 나를 조용히 응원하던 정. 그건 단순한 역할극이 아니라, 우리가 서로를 바라보는 방식 그 자체였다.
졸업을 앞두고 나는 글을 전공으로 배울 수 있는 대학에 합격했고, 건강이 더 악화된 정은 졸업식도 치르지 못한 채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그렇게 세상은 우리를 각자의 속도로 끌고 갔다. 연락이 뜸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정에게 연락이 온 건 내가 군 복무 중일 때의 일이었다. 국방부 의장대대에서 행사병으로 복무하던 나는 전역을 몇 주 앞두고 정으로부터 문자 한 통을 받았다.
“나 너희 학교 시험 보러 가.”
3년 만이었다. 정이 여전히 희곡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반가웠다. 동시에 그 시간 동안 얼마나 버텨냈을지를 생각하니 마음 한편이 저릿했다.
나는 짧게 답했다. 전역 전 마지막 휴가가 시험 기간과 겹친다며, 볼 수 있을 거라고.
시험이 끝난 뒤, 우리는 학교 근처 한정식집에서 밥을 먹었다. 정은 예전보다 말이 적어졌지만, 그 침묵은 오히려 편안했다. 나는 반찬으로 나온 멸치볶음을 먹기 위해 젓가락을 들었다. 그 순간, 정이 내게 물었다.
“언제부터 오른손잡이가 됐어?”
그 말에 나는 그제야 내 손을 내려다봤다. 오른손이었다. 원래 왼손잡이였던 나는, 군대라는 사회 안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연스레 오른손을 익혀야 했다. 의장대에선 모두가 오른손으로 총을 들고, 오른손으로 제식을 해야 했으니까. 그때까지는 그렇게 사는 게 더 편하다고 여겼다. 아니, 어쩌면 단지 덜 불편하고 마찰이 없는 쪽을 선택했을 뿐이었다. 정이 말했다.
“후천적 오른손잡이네.”
정은 그 말 외에는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하지만 그 한마디에 나는 오래 멈춰 있었다. 감정도, 판단도 담기지 않은, ‘정’만의 고유한 말.
식사를 마친 우리는 캠퍼스를 걷기로 했다. 정이 학교를 좀 더 둘러보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다른 학생들의 추억이 깃든 낡은 계단들을 오르고, 다리 밑을 지나고, 벤치에 자주 멈춰 앉았다. 정은 오래 걷지 못했다. 대신 우리는 천천히 걸었다. 정이 견뎌낸 시간만큼이나 느린 걸음이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캠퍼스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잔디 언덕이었다. 언덕 끝자락에 선 정이 등을 돌리고 앉았다. 기울어가는 햇빛이 정의 어깨를 물들이고 있었다. 나는 그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제야 정이 입을 열었다.
“나, 이 언덕에서 밀어 떨어뜨려 줘.”
처음엔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이토록 연약한 너를 알고 있는 내가, 너에게 어떻게 그런 가혹한 짓을 저지를 수 있을까. 그런데 정은 웃지 않았다. 그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걸 깨닫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너도 나만큼이나 진심이었구나.
정은 말했다. 이 언덕에서 굴러떨어지면 꼭 합격한다는 미신이 있다고. 그리고 덧붙였다.
“그런데, 나 혼자서는 못할 것 같아.”
정이 앞서 말한 ‘후천적 오른손잡이’라는 말이, 그제야 온전히 이해되었다. 그건 단순한 관찰이 아니었다. 내가 잊고 있던 나의 조각을 붙잡고 있는, 아주 조용하고 깊은 기억이었다. 세상이 내게 변화를 강요할 때, 내가 원래 어떤 사람이었는지 잊지 않고 있었다는 것.
그리고 지금, 정은 나만이 들어줄 수 있는 부탁을 조심스레 꺼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정의 등을 조심스럽게 밀었다. 정은 언덕 아래로 굴러가며 크고 명랑하게 웃었다. 나도 웃었다. 오래된 안간힘과 침묵이 한꺼번에 언덕 아래로 구르며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이제 안다. 다정이란, 아주 사소한 것조차 기억해 주는 일이다. 그것은 누군가의 뒷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 그리고 그 사람이 더 멀리, 더 깊은 바다로 나아가길 바라며 말없이 등을 밀어주는 마음. 정은 그런 사람이었다.
고래를 꿈꾸는 멸치를 진심으로 믿어준 사람. 세상이 나를 오른손에 맞추게 했을 때, 나조차 잊고 있던 나의 왼손을 끝까지 기억해 준 사람. 이제는 정이 나 대신 고래가 되길 꿈꿀 차례였다.
그 다정한 마음이 결국, 우리 둘을 이곳까지 데려다주었다. 우리만의 작은 소란이 있고 난 뒤, 정은 그 다음 해 봄, 이 학교에 입학했다. 21학번인 나와 25학번인 정은 이제 선후배가 되어, 다시 하나의 이야기를, 우리만의 방식으로 써 내려가고 있다.